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나다 마사유키 (문단 편집) == 생애 == 어린 시절 [[다케다 신겐]]의 명으로 무토 가에 양자로 들어가서 무토 기헤에 마사유키란 이름을 받았다. 이후 다케다군의 메츠케로써 활약했으나 [[나가시노 전투]]에서 큰형 노부츠나, 둘째 형 마사테루 두 형이 다 죽었다. 그래서 사나다 가문이 단절될 위기에 놓였기 때문에 다시 사나다 씨로 입적하여 사나다 마사유키가 되었다. 마사유키의 아버지인 유키타카는 다케다 신겐이 시나노를 정벌할 즈음부터 참모였고, 자신도 어려서부터 신겐의 시동으로 시작하여 옆에서 그 군략을 보고 익혔기 때문에, 고슈류 군략의 정통 후계자라고 할 수 있다.[[시마 사콘]], [[나오에 카네츠구]]와 함께 천하 3군략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30px-Sanada_Masayuki.jpg]] || || 카와나카지마 전투 때의 소년장수 || 첫 전투 출전은 제4차 [[카와나카지마 전투]]에서 [[아시가루]] 대장이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사실여부는 불분명하다. 이때 나이가 15살때였다. [[다케다 신겐]]의 측근으로 활약하고. 나중에는 다케다 가의 영역이었던 [[시나노]]의 [[우에노]]와 코즈케의 누마타를 영지로 맡아 다스렸다. 그러나 [[다케다 신겐]]이 병사하고 [[다케다 카츠요리]]가 뒤를 이었다. 마사유키는 신푸 성 건설에 착수하고 누마타 성을 손에 넣는 등 다케다 가문을 위해 분골쇄신했으나 1582년, 노력도 헛되이 [[오다 노부나가]]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연합군에 의해 다케다 가는 멸망한다. 1582년, 오다 가문의 시나노 방면 총대장 [[타키가와 카즈마스]]의 대대적인 침공이 시작되자 주군인 [[다케다 카츠요리]]에게 본인의 관할 구역인 시나노 지역으로 피신해 올 것을 권유하였으나 이미 다케다의 군세는 완전히 와해된 상태라 가츠요리 일행에서 병사는 수십 명 정도밖에 안됐고 대부분이 비무장의 일꾼, 시녀들 뿐이었다. 때문에 험준한 길목에 위치한 시나노의 우에다 성이 아닌 가까운 오야마다 노부시게의 이와도노야마 성으로 발길을 옮겼지만 이미 노부시게는 오다 측과 내통하고 있었다. 결국 앞은 배신자, 뒤는 추격군에 의해 궁지에 몰린 가츠요리 일행은 텐모쿠산에서 자결한다. 이로 인해 오야마다 노부시게는 배신자로 비난받고 마사유키는 '마지막까지 타케다를 지키려한 충신' 이미지를 얻었다. 관련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 마사유키가 호죠 가와 자주 서신을 주고 받았다는 자료가 발견되어 오늘날에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데,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마사유키가 호죠 가와 짜고 카츠요리가 오면 붙잡아서 호죠 가에 보내겠다고 약속하고 있던 게 아니냐는 주장을 펴나 이는 상상에 기반한 것으로 실제 근거가 뒷받침되어 있는 주장은 아니다.[* 우에노와 누마타는 호죠 가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던데다, 동맹은 오다테의 난 문제로 인해 파기되었을 지언정 양국의 교류까지 하루아침에 끊어진 것은 아니므로 서신을 교환하는 것을 수상한 일로 보긴 힘들다. 주가의 멸망이 기정사실이 된 시점에서는 살아남을 방도를 궁리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야마다 노부시게가 더욱 비난을 받는 이유는 그나마 우호관계가 있었던 호죠 가와는 달리 오다 가의 경우에는 당장 '''[[나가시노 전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부터 생각해보자.'''][* 설령 정말로 호죠 가에 넘길 생각이었다 한들 불구대천의 원수 격인 오다 가와 내통하고 있던 오야마다 노부시게와는 무게감부터가 다르다. 오다 가와 다케다 가의 관계는 더 따질 필요도 없는 적대관계인만큼 카츠요리가 오다 가에 넘겨진 후의 선택지는 [[끔살|단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지만, 호죠 가의 경우에는 비록 다케다와의 동맹을 파기했다고는 하나 카츠요리의 아내가 호죠 우지야스의 딸이었고 호죠 측이 당시 오다 편을 들고는 있었지만 고슈 정벌 내내 소극적으로 일관한데다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던 만큼 목숨을 보장받을 최소한의 기회는 있었다고 보는 편이 설득력이 있다. 예를 들어 카츠요리의 존재를 내세워 시나노의 지배권을 주장할 수도 있었다는 것. 실제로 고슈 정벌 이후에도 호죠 우지마사는 오다 가의 눈치를 살피는 기색이긴 했으나 혼노지의 변으로 노부나가가 죽자 태도를 손바닥 뒤집듯 바꿔 코즈케와 시나노를 침공하였으므로...] 새로 나오고 있는 전국시대 관련 컨텐츠에서도 서신을 주고 받았다는 내용은 반영하되 마사유키 배신자 설은 배제하는 방향을 택한 것을 보면 이는 막연한 추측 내지는 낭설에 불과하다는 것이 중론. 타케다 가 멸망 후, 마사유키는 선조들의 고향인 [[시나노]]의 [[우에다]]에 자리잡는다. 그리고 상황을 보다가 쾌진격을 해오는 [[오다 노부나가]]에게 복속하여 타키가와 카즈마스의 휘하에 배치되었으나 3개월 후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급사하자 상황은 급변하게 된다. 호죠 우지마사에게 타키가와 카즈마스가 패하자(칸나가와 전투) 카즈마스를 시나노 근처까지 보내 준 뒤 대놓고 오다의 뒤통수를 치지는 않았지만 무주공산이 된 구 타케다 영지의 가신들을 포섭하는 등 물밑공작을 하였다. 그렇게 세력권 기반을 다지면서 오다가문이 물러나자 도쿠가와에게 접근해 우에스기를 비롯한 북방의 적들을 견제를 위한 방어력이 뛰어난 성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자기에게 투자만 해준다면, 우에스기를 비롯한 북방의 적을 막아주겠다며 구슬렸으며 그렇게 이에야스의 돈과 인력을 원조받아 자신의 노하우를 반영한 성 설계도가 완성되고 당시로서는 최첨단 축성기술까지 더해지면서 전략적 요충지이자 사나다 가문의 본성이 되는 우에다 성을 짓는다. 이것이 나중에는 이에야스 군의 침공을 막는 아이러니가 되기도 했다.[* 일부 일본 역사학자들은 마사유키가 우에스기는 물론 이에야스의 북상을 막기 위한 확실한 성을 얻기 위해 이에야스에게 일부러 접촉해 사기에 가까운 딜을 성사했다는 설을 이야기 하기도 한다.] 이후 도쿠가와와 우에스기를 견제하기 위해 잠시 호죠 가문에 복속하게 되는데 이때 구 타케다의 영지인 시나노와 카이의 지배권을 두고 호죠와 도쿠가와 사이에 전투(텐쇼 진고의 난) 벌어진다. 이때 도쿠가와는 마사유키에게 밀사을 보내 마사유키가 호죠의 후방을 공격 및 사나다 영지를 지나는 보급로를 차단해주면 영토를 인정해주겠다는 제안을 하자 마사유키는 친척 사나다 노부타다를 보내 시나노와 카이 영지 인정을 요구한다. 도쿠가와는 일단 전황이 급하니 이를 받아들이고 확약을 하면서 도쿠가와라는 뒷배를 얻게되자 호죠를 배신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동맹을 맺는다. 그렇게 마사유키는 보급로를 끓는 등 호죠가문의 후방을 끓는 활약에 단숨에 전황은 이에야스 측으로 기울기 시작하자 다 이긴 전투에서 진 호죠가문은 아득바득 이를 갈 수 밖에 없던 상황이었다. 그렇게 사나다는 승리의 여운을 느끼기도 전에 갑작스럽게 이에야스는 호죠와의 휴전협정과 동시에 동맹을 맺고 호조 가는 동맹의 조건으로 사나다의 영지인 누마타 지역 먹는다는 것을 걸었고 이에야스는 이를 동의하였다. 당연히 마사유키는 반발하였고 바로 도쿠가와와는 동맹을 파기하게 되면서 사나다와 도쿠가와 가문가의 악연이 이 일을 기점으로 시작된다. 그렇게 도쿠가와와 호죠 두 가문과 척을 지게된 마사유키는 자신들을 지켜줄 뒷배로 과거 통수를 한번 때렸던 우에스기에게 접근한다. 반면 우에스기의 우에스기 가게카츠는 사나다의 박쥐같은 배반 행동으로 인해 못 미더워하여 인질을 보내라고 요구, 이에 차남 [[사나다 노부시게]]를 인질로 보냈다. 한편 이에야스는 빨리 호죠에게 누마타 지역을 양도하라는 요구를 연일 보내지만 마사유키는 이전 약속을 거론하며 이를 거부, 자신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도쿠가와가 [[토리이 모토타다]], 오쿠보 타다요, 히라이와 치카요시 등의 가신들을 필두로 7천 명[* 일설에는 3만 명]의 정벌 병력을 보내면서 사나다 마사유키는 도쿠가와/호죠 양측에게 공격을 받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마사유키는 이에 맞서 약 2천 명의 병사와 자신의 영지에서 징집한 농민 연합군으로 우에다 성에서 농성, 도쿠가와 군을 도발해 유인한 뒤 매복과 함정을 이용한 마사유키의 지략으로 대승을 거둔다. 누마타 성도 호죠에게 공격을 받았지만 누마타 성주의 끈질긴 저항으로 상황이 종료되기 전까지 함락되지 않았다. 먼저 [[게릴라]] 전술로 200명의 기습부대로 적의 전방을 공격하고 후퇴, 뒤따온 적을 일부러 성문을 열어 성 안으로 유인, 산노마루를 함락하고 방심해 있던 적을 전군 일제 집중 사격과 큰 돌과 나무로 공격, 당황하고 도망치는 적병을 바깥 성에 대기하고 있던 부대가 측면에서 2차 기습공격. 후퇴하는 적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마을에 불을 질렀고, 추격하면서 재공격. 이때 마사유키는 유유히 [[바둑]]을 두고 있었다고 한다. 결과 도쿠가와 측은 5명 중에 1명이 죽는 1300명의 사망자를 내고 패퇴, 그에 비해 사나다 측의 전사자는 40명에 머물렀다. 이것이 1585년 8월에 벌어진 제1차 우에다 전투이다. 여담으로 [[육상자위대]]에서 유일하게 가르치는 농성전[* 현대의 시각으로 보면 농성전이면서도 성 안 마을까지 이용한 셈이니 14세기판 첫 시가전이라 할 수 있다.]이라고 한다. 이 우에다 전투에서 마사유키는 우에스기 가에게 원군을 요청했는데, 당시 우에스기는 내부 상황과 이전 다케다 가문과의 전투로 병력 소모가 심해 여유가 없었으나 의를 중시하는 우에스기 가문은 어떻게든 긁어모을대로 긁어모아 적은 수의 병력만을 원군으로 보냈다. 이후 우에스기는 중앙조정의 명을 이용한 도요토미에 의해 복속하게 되면서 더 이상 우에스기를 의지할 수 없다고 판단한 마사유키는 패권을 잡은 도요토미 히데요시한테 복속하였으며 이에 우에스기가에 인질로 있던 노부시게를 보낸다.[* 사나다 가문에 대한 역사적 고증을 좀 반영한 사나다마루 대하드라마에서는 우에스기 측이 도요토미의 세력을 보기위해 사신을 보냈다가 되려 도요토미 가문의 인질이자 객장이 되었고 온갖 고민끝에 마사유키가 도요토미측에 붙는것으로 되었다.]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자신의 권위를 교묘하게 이용하며 둘 사이를 중재, 사돈 관계를 맺게 했다.[* 히데요시가 매우 교묘했는데 처음에는 도쿠가와가 도요토미에게 상락을 하며 복속되면서 사나다를 쳐도 되냐는 요청에 "마음대로 해라"라고 하여서 도쿠가와는 히데요시의 허락도 받았겠다 신나게 병력을 집중시키며 전쟁준비를 하였는데 갑자기 히데요시로부터 "야, 사정이 바뀌었으니 공격하지 마라" 라는 지시가 내려온다. 도쿠가와는 많은 돈 들여서 전쟁준비를 했는데 자신의 힘으로는 히데요시에게 한 주먹거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일단 전쟁준비 중지를 명한다. 즉, 도요토미 한 마디에 대다이묘 도쿠가와 측의 전쟁준비가 올 스탑 되는 꼴을 보였으니 일본 전국에 히데요시의 힘을 과시한 꼴이었다. 이후 히데요시의 중재안은 정략결혼과 사나다 가문은 도쿠가와의 군문에 들어간다는 조건이었다.] 사돈 관계가 된 이는 마사유키의 장남 노부유키와 도쿠가와의 중신이자 맹장 [[혼다 타다카츠]]의 딸인 [[이나히메]]를 결혼시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마사유키가 '나도 영주고 이에야스도 영주인데 급이 낮은 이에야스의 가신과 사돈이라니 말도 안된다'라고 하며 반발하자 결국 이에야스가 형식상 양녀로 삼아 사돈을 맺었다. 물론 형식적인 양녀라 마사유키와 이에야스가 직접 사돈이라고 여기지는 않는다. 실제로 세키가하라 전투 후에 마사유키의 구명요청도 노부유키와 혼다 타다카츠가 했다. 이후 도요토미 체제 아래에서 도쿠가와의 군문에 들어가게 되었지만 천하를 잡은 도요토미 집안과 깊은 인연을 맺어두었는데, 차남 노부시게는 도요토미의 중신이자 이시다 미츠나리의 맹우 [[오오타니 요시츠구]]의 사위였을 뿐만 아니라, 히데요시에게 '겐지'(노부시게의 아명 겐지로의 애칭)라 불리며 귀여움을 받았다. 어찌되었든 히데요시한테 다이묘로 인정받고 도요토미의 중재하에 이에야스와 화해했지만, 호죠는 도요토미에게 상락을 거부하면서 버티다가 호죠측이 누마타를 넘기면 상락을 하겠다는 딜을 걸어온다. 히데요시는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면 된다라는 마음으로 이를 받아들이는 바람에 결국 누마타 성 영지를 넘겨야 했는데 마사유키는 누마타의 나루구미에 사나다 가문의 선조가 뭍힌 선산이 있으니 이는 양보할 수 없다고 요청하였고 도요토미측이 이 의견을 받아들여 나루구미를 제외한 누마타성과 누마타 영지 3분의 2를 호조 가에게 넘겨주게 된다. 대신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그만큼을 땅을 받아서 영지의 크기는 유지했다. 그러나 호죠의 우지마사는 이 협정은 사실상 반쪽짜리 거래라 생각한데다가 북방의 맹우 다테가문과의 동맹을 믿고 따를 생각은 없었고 나루구미가 누마타 성보다 고지대에 있어서 껄끄러운 위치에 있다보니 사나다 가문의 나루구미 성을 호조 가문이 공격해 점령해버린다. 이는 우지마사가 '''호죠가문을 멸문으로 이끈 최대 실책'''으로 도호쿠의 다테를 제외한 나머지 다이묘들로 부터 상락을 받아낸 천하인 히데요시의 중재를 위반하는 것이었다. 히데요시는 즉각 중재안에 따라 나루구미를 돌려주지 않는다면 전면 전쟁이라며 호죠가문에게 최후통첩을 보냈으나 호조 우지마사는 이를 무시한다. 히데요시 상락관계에 있는 모든 다이묘들에게 '''호죠가문 토벌에 관한 호령'''을 내렸다. 소집된 마사유키는 히데요시의 명대로 [[우에스기 카게카츠]], [[마에다 토시이에]] 등과 함께 호죠가문의 거점 오다와라성 전투가 아닌 호조 가문의 북쪽영지를 공격하는 군으로써 출전했다.[* 이는 사나다에 대한 영향력을 도쿠가와로부터 일시적으로 되찾은 견제 행위로 해석된다.] 결국 1590년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오다와라성]] 전투에서 호조 가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통일. 이후 마사유키는 누마타 영지도 되찾았다. 시간이 흘러 히데요시의 헛된 망상으로 시작된 [[임진왜란]]에 동원령을 받아 규슈에 위치한 나고야성에 집결했으나 다행히도 소규모 세력이라 참전하지 않고 평온한 세월을 보내던 중, 1598년 8월 18일 히데요시가 지병으로 사망한다. 이후 마사유키는 토요토미 가신들 사이에서 친도쿠가와 vs 반도쿠가와 세력으로 나뉘는데 여기서 줄타기를 하며 상황을 지켜봤는데 이 다툼이 결국 [[세키가하라 전투]]를 부른다. 1600년 6월 도쿠가와는 우에스기 가문의 군사 나오에 카네츠구가 도요토미를 통렬히 비꼬는 나오에장을 받고서 매우 열받은 이에야스[* 나오에장 현실에 존재하는지 안 하는지에 대한 여부가 확실치 않으며 일단 도쿠가와측이 우에스기 토벌을 위한 명분을 만들기 위한 가상의 문건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일단 나오에 카네츠구가 이에야스를 통렬히 까는 내용이었고 이에야스가 얼마나 열 받았는지 가신들 보는 앞에서 서신을 갈갈히 찢어버렸다고 한다.]는 '우에스기가 평화를 깨려고 하며 전쟁준비를 하고 있다.'는 명분으로 [[우에스기 카게카츠]]를 토벌하기 위해 군대를 보내는데 도요토미의 중재로 도쿠가와를 섬기고 있던 마사유키도 이 토벌군에 속해 있었다. 그런데 7월 21일 [[이시다 미츠나리]] 일파로부터 비밀 편지를 받고, 서군에 붙어서 승리에 일조해준다면 엄청난 보상을 주겠다며 우리 편에 서라는 제안을 받는다. 일단 동/서군 어디에 붙더라도 연줄이 있어서 갈등하던 마사유키는 가족 회의 결과, 도쿠가와 가의 사위였던 장남인 노부유키는 동군으로, 자신과 노부시게는 서군 측에 참가한다.[* 이에야스가 반드시 다시 우에다를 노릴 것이라고 생각했고, 전쟁에서 져도 가문은 이어갈 수 있으리라는 판단이었다.] 우에다 성으로 돌아가던 도중 며느리 [[이나히메]]가 지키던 누마타 성에 손자를 보자는 핑계로 들어가려 했으나 노부유키가 없는 것을 보고 의심한 이나히메가 시녀들까지 완전 무장을 시켜 성벽에 배치하고 노부유키가 있어야 성문을 열겠다고 활을 들이대서 그대로 물러났다는 일화가 있다. 다만 마사유키가 물러난 뒤 사적으로 아들과 함께 마사유키에게 찾아갔다고 한다. 이에야스는 군대를 두 개로 갈라, 삼남인 [[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 3만 8천명의 군사를 맡겨 북쪽 길로 가서, 마사유키가 있는 우에다 성을 공략하고 세키가하라에 합류하는 전략을 짰으나, 이 역시 마사유키의 지략으로 우에다 성에서 2500여 명의 군사로 농성전을 펼쳐 무려 1주일을 버텨냈다. 이때 무단파의 수장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기후성을 점령하고 파죽지세로 진격, 세키가하라에서 이시다 군이 진을 친 정보를 얻은 이에야스는 상황파악이 빠르게 한 뒤 곧바로 우에다 성을 공략하던 히데타다&마사노리의 군대에게 세키가하라로 합류명령을 내린다. 결국 도쿠가와 군대는 성의 공격을 포기하면서 세키가하라로 진군한다. 마사유키는 어쨌든 이 엄청난 공적을 세운데다가 도쿠가와 군으로부터 승리하였으니 축배를 들며 상황을 지켜보며 서군이 이기겠지 라는 마음으로 관망을 하는데 마사유키의 생각과 달리 세키가하라 전투는 단 하루 그것도 '''6시간만'''에 동군의 승리로 끝났고, 사나다에게 발목을 붙잡힌 히데타다는 5일이나 늦게 도착해서 이에야스에게 무진장 깨지게 된다. 그러나, 세키가하라에서는 도쿠카와 측이 이끄는 동군이 너무나도 가볍게 압도적인 승리하여, 사나다 집안은 그 대가를 치루게 된다. 마사유키는 이 패전소식에 그야말로 믿을수 없었지만 서군 패전소식에 우에스기가 바로 꼬리내리며 항복한데다가 2500명의 군세로 수만에 가까운 도쿠가와 군을 이길 힘은 없는 자기들이 저항한다 한들 개죽음이라 여겼고 자신의 장남 노부유키가 구명해주겠지 라는 마음으로 항복을 한다. 결국 마사유키가 다스리던 우에다 영지([[고쿠다카]] 3만 8천 석)는 몰수되어 노부유키에게 이어졌고 자신과 함께한 차남 노부시게와 함께 쿠도야마로 유배되었고, 이에야스 편에 섰던 노부유키가 기존의 누마타(2만 7천 석) 영지와 함께 세키가하라 공적으로 얻은 3만 석을 더해 9만 5천성의 중소 다이묘가 된다. 마사유키는 생전의 히데요시조차 '''보통내기가 아닌 자'''(表裏比興の者)라고 하여 두려워하고 경계한 인물이고, 이에야스는 마사유키에게 10배가 넘는 병력으로 큰 피해를 입었던 일이 2번이나 있었으니 그 정도가 더 심하여 마사유키가 도쿠가와 반대측에 붙는다면 도쿠가와에게 큰 위협을 끼칠거라 판단해 아예 죽이려고 했지만, 노부유키의 장인인 혼다 타다카츠는 노부유키의 탄원에 응해 "만약 주군이 내 사위의 아버지를 죽이려 한다면 그전에 소승 헤이하치로와 일전을 벌이셔야 할 겁니다."라는 첫 협박[* 타다카츠는 이 일이 있기전까지 이에야스에게 단 한번도 NO를 외치지 않은 예스맨에 가까운 충신이자 맹장이었다.]에 가까운 탄원을 받아들인다.[* 도쿠가와가 혼다 타다카츠의 협박에 꼬리내린게 아니라 혼다 타다카츠가 단 한번도 자신에게 거스르지 않은 충신이 처음으로 반대표를 던져서 타다카츠의 체면을 살려줄 겸 받아들인것이다.] 결국 마사유키를 차남 노부시게와 함께 [[키이]]국 구도산(현 구도야마 정)[* [[와카야마현]] [[쿠도야마역]] 인근.]에 유폐시켜버리는 것으로 끝낸다. 도쿠가와 아래 가문을 보전한 노부유키는 그래도 자주 찾아와 아버지를 극진히 모셨던 모양인데, 마사유키는 요구조건이 까다로운지라 항상 애먹었다고 한다. 구도산에서 마사유키는 생활고를 겪었다고 하지만 사실 나름 대접을 받았으며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동쪽(에도)으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혼다 마사노부]]를 통해 탄원을 넣을려는 시도도 해봤지만 이에야스는 마사유키가 유폐에서 벗어나면 어디로 튈 지 모른다고 판단해 유폐조치가 풀리지 못 하였다. 그렇게 유폐 해제는 이루어지지 못하고 이에 크게 실망하게 되면서 건강 역시 악화된다. 결국 마사유키는 1611년 끝내 전란에서 다시 날개를 펼치고 싶다는 뜻을 펼칠 기회를 잡지 못하고 노환과 병으로 죽었지만, 쿠도야마에서 유폐되어 있는 동안 군략을 차남인 노부시게에게 가르쳐주고 자신의 노하우가 담긴 비전서를 주며 전략/전술을 가르쳐준 덕분에 노부시게는 지휘관으로써 첫 실전인 [[오사카 전투]]에서 그 이에야스를 여러번 궁지에 몰아넣기도 했다. 그런데 마사유키는 병석에서 죽어가면서 아들에게 '나한테 도쿠가와를 쳐부술 기가 막힌 전술이 있거든? 근데 이건 나처럼 유명한 사람 아니면 못 해. [[우린 안될꺼야 아마|근데 넌 무명이잖아 넌 안 될 거야, 아마.]]'라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마사유키의 말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는데 아군측이 들어도 하도 대담한 작전이라 군략의 천재로 검증받은 자신이 진언하면 모를까 당시까지만 해도 무명이었던 노부시게가 진언하면 들어주지도 않을 거라는 의미였다. 실제로 노부시게는 오사카 입성 내내 출진을 진언했지만 무능한 오사카 수뇌부들은 농성만 하면 이긴다며 언제나 각하당했다.[* 실제 마사유키가 이 시절까지 생존해서 오사카 전투를 지휘했다면 도요토미 가문이 승리했을 가능성이 어느정도 있었다는 의견은 생각보다 많은 편, 일단 도요토미 가문 측을 깍아내릴 의도도 어느정도 있어보이지만, 당시 도요토미 가문을 총 지휘한 사람이 요도도노가 아니라 장성한 히데요리였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라고 적힌 내용은 제법 있는 편인데, 만약 마사유키 정도되는 재능과 명망 있던 사람이 도요토미 가문 측에 있었더라면 히데요리는 베테랑인 마사유키를 전적으로 신임하며 친정이 한결 수월해지긴 했을 것이다. 추가적으로 노부시게가 주구장창 주장한 것 하나가 바로 히데요리의 친정이었다. 실제로 [[오사카 전투]]는 요도도노의 실책에도 불구하고 말년의 이에야스도 사나다 노부시게에게 죽을 고비를 넘겼을 정도로 매우 치열하게 전개 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일리가 없는 IF는 아니다. 그러나 마사유키가 있었어도 실패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는편이다. 일단 요도도노를 비롯한 오사카 수뇌부의 무능은 상상을 초월했고 히데요리는 어머니에게 약한 모습만 보이던 마마보이였다. 더욱이 마사유키가 군략으로 유명한 장수 이미지가 있듯 반대급부로 '''우에스기->도쿠가와-> 다시 우에스기 등등의 배신의 아이콘'''으로 유명하여서 요도도노를 비롯한 오사카 수뇌부들이 친정을 반대한 이유가 '''히데요리의 안전'''인데 그 안전을 마사유키가 배신을 해버리면 본말전도이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반대했을 가능성도 있었다는 것이다.] '사나다가 오사카 성에 입성하였다'는 보고를 받은 이에야스는, '아버지인가, 아니면 아들인가!?'라고 물으며 사시나무 떨 듯 떨었다고('이미 죽었는데 왜 떠냐?'는 반응을 한다면 위의 내용을 다시 보시기를 권한다. 죽은 척하고 숨어있기에 딱 좋은 이미지). 아들 쪽이라는 보고를 받자 이에야스는 '그럼 별 것 아니군'이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하나, 결과적으로는 아버지의 군략을 제대로 이어받은 노부시게(유키무라)에게 흠씬 당했으며 요도도노를 비롯한 오사카성 수뇌부가 무능했기에 망정이었지 안그랬으면 진짜 졌을지도 모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